나는 지금 가장 예민한 존재다.
누가 사춘기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만들었을까.
서른 언저리에도 여전히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다.
구질구질한 감정에 휩싸여 쩔쩔매는 일이 가끔 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뭐 하나 개운한 게 하나 없다.

그럴 때면 나는 행복한 기억 속의 음악을 찾게 된다.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더라도 굳이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길을 걷는 시간에도 나를 제 3의 공간으로 몰아 넣어준다.
송북을 들으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고 점점 기쁨이라는 감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008년 12월.
깜짝 선물로 받은 윤상의 송북.


첫 사랑과 찍은 사진을 우연히 책 속에서 발견한 느낌이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오히려 무겁고 진지해서 숨막히는 그런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내가 '윤상'이라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음악가 이외의 다른 것들도 미묘하게 얽혀있다.


내 생애 첫 라디오 DJ
.

저학년의 초등학생이 10시 이후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무한대의 상상 속에서 그려냈던 윤상은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사람이었다.


언니가 사온 윤상 1집 LP 자켓을 통해 처음 본 윤상은 기다란 갈기머리에 이지적인 느낌이었는데,
내 상상속 이미지와 싱크로율이 80% 는 맞아 떨어졌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상위 레벨이 된듯한 느낌이 들어 무작정 그를 흠모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저그런 음악들로부터 듣는 귀를 탈출시킬 수 있었다.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는데 노래만한 것이 있을까.
송북은 내게 너무 벅차다.
듣는 내내 너무 긴 시간을 거슬러 가야하고 너무 많은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적어도 15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를 웃고 울게 만들었던 시간들을 다시 만났다.

미국에서 돌아온 윤상은 더 멋지고 근사해졌지만,
그로부터 듣게 된 신디사이저로 즐비한 음악들은 떨어져있던 시간만큼 괴리감도 느껴졌다. 
송북은 윤상의 노래들을 다른 아티스트들에 의해 재해석된 앨범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즈막히 읊조리던 윤상의 보이스를 듣지 못해 아쉬움이 컸지만
커다란 종합선물세트처럼 풍성한 사운드가 가득한 기대 이상의 앨범이다.
윤상의 노래들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 )

개인적으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곡은 많은 사람들이 손꼽고 있기도 한,
이션균의 매력적인 음색이 죽여주는 '소년'.
처음 듣는 순간 숨이 턱하고 막힌다. ( 역시 중저음의 굵은 보이스는 여심을 사로잡는다.)
음색도 음색이거니와 그의 농밀한 목소리 뒤에 깔리는 반주 또한 죽여준다.

그리고 하임이라는 아티스트의 재발견.
그녀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다.
유연한 사운드를 자연스럽게 펼쳐 보이는 그녀가 조금 질투나기도 한다.
이별없던 세상은 원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김형중의 보이스를 잘 살려 주었다.

빼놓으면 안되는 이 곡. 유희열의 새벽.
코끝에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순간과 같은 느낌을 준다.
라디오 천국의 감동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중간의 유희열 보이스도 피식 웃음이 나게 한다.
"잿빛 거리 위엔 아직 남은 어둠이 아쉬운 한숨을 여기 남겨 둔 채
지루했던 침묵은 깨어지고 눈을 뜨는 하루"


마지막으로 너무 기뻤던 건 노영심의 배반.
가장 좋아하는 곡을 존경하는 아티스트의 연주로 들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멋진 일은 없지.
피아노와 마주한 노영심은 여느때처럼 담담하고 담백하게 연주한다.
찬 바람 부는 오늘 같은 날, 따뜻한 카페에 앉아 듣고 있으면 곁에 누가 없어도, 커피가 식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외 페퍼톤즈, 조원선, 윤건, 마이앤트메리, 박지만, 정재일, 엄정화, 소녀시대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다른 아티스트로부터 재해석된 곡들도 새롭고 매혹적이긴 하지만,
몇 개의 곡들은 원곡쪽이 좀더 낫다고 생각한다.

윤상의 음악으로부터 시작된 기억의 호출...
내 나이만큼 성장해온 그의 음악이 새롭게 진화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팬으로써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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